아무 말씀도 안하시더라

며칠전에 수용이 한테서 ‘성적표가 집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았고, 수용이의 학점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싶었다. 전화기를 든 채로 얼른 내려가 우편함부터 뒤져봤다. 비어있는 우편함 확인함과 동시에 ‘설마, 벌써 누군가의 손에… 아니겠지!’ 생각하고 성적표가 오는대로 얼른 없애버려야지 했다. (소각정도면 깨끗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 날 저녁에 친구들이랑 “바다나 보러갈까?” “그럴까?” 이러다가 바닷가에 가게되었다. 너무도 충동적이었지만 재미있게 놀았고 술도 한잔 했기에 당일 돌아올 수 없었다. 숙소같은거 예약했을리 없다. 밤새 바닷가에서 놀고 집에 오는 길에 문득 떠오르는 성적표!

내심 신경쓰였지만, 성적표 도착했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저 태연한 척 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성적표 왔더라. 아빠가 보시고 아무 말씀도 안하시더라. 열심히 한거야?’

나는 대충 얼버무렸지만, 내가 공부안해서 그랬다고는 안했다. 죄송스러웠다. 불효자식;;

나는 어렸을 적부터 성적때문에 엄마, 아빠한테 심하게 꾸중을 들은 적이 없다. 내 성적을 잘들 알고 있겠지만, 잘해서가 아니다. 그저 열심히 하라고 격려만 하실뿐이셨다. 나를 믿고 내 스스로 하기를 원하신다. 그런 엄마,아빠의 뜻을 알고있기 때문에 성적표가 집에 올때면 심하게 혼나는 친구들만큼이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른 친구들처럼 아르바이트해서 등록금은 커녕 용돈도 한푼 보태쓰지 않는데.. 그런 성적표를 받으시게 하는게 죄송스럽다.

“아무 말씀도 안하시더라.”

계속 생각난다. 아마 이번에도 나를 믿고 나 스스로에게 맡기시는 것 이리라. 절반이라도 아니, 백개에 한개씩이라도 생각한대로 실천하는 것, 그것이 엄마, 아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길이겠지..

Tags: , , , , , , , , , , , , , , , , ,

찬 물 뒤집어쓰기

그럴 줄 알았다. 당연히 예상했던 바다.

사상 최악의 학점이다.

남 들은 혹시 맘에 안 들게 나온 과목 있으면 교수님 찾아가보고 왼통 난리를 피우느라 하루라도 더 빨리 학점 확인하려고 아우성들인데, 아무 생각도 없고 그저 덤덤하게, 될대로 되라였던 걸 보면 내가 정말로 학점에 관심이 없긴 없었나보다. 시험 죄다 망한 거 뻔히 아는데 뭘 보고 싶었겠나. 학점도 어느 정도 공부를 해야 기대가 되는 법이지.

요새 들어 자주 하는 생각이지만, 그동안 대학생활 참 헛했다. 단순히 학점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대입 이후 될대로 되라는 살아왔다는 기분이 든다. 그러니 학점이 좋을리가 있나. ‘이 학문과 나의 적성’사이의 관계가 큰 우리과의 특성상, 어거지로 하면서도 학점 다 챙기는 실속파들도 있지만 나는 그런 부류가 못 된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거다. 이제까지 내 성적표는 항상 다양한 학점이 공존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건 확실히 잘하니까, 라는 말로 나를 정당화하고픈 생각은 꿈에도 없다. 그건 그저 우스운 변명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소리다. 좋아하는 것을 잘한다는 건 누군 못하나? 못하면 바보지. 싫은 것도 해낼 줄 아는 게 바로 능력임은 말할 나위도 없지 않은가. 싫어서 안했다는 것도 결국은 능력부족의 방증일 뿐이다. 노력도 능력이다. 당연한 진리 아닌가.

내 천성이 게으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을러도, 거의 항상 그 노력 이상의 결과를 얻어온 것 역시 사실이다. 이건 행운이며, 그냥 나라는 인간이 불쌍해서 이제까지는 운이 나를 도와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거에 대해서는 그저 감사할 일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요새 전반적으로 나를 돌이켜보면 공부니 뭐니 내가 하는 일들 뿐만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가 뭔가 대수술을 받아야 할 때가 오고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든다.

머리좋은 사람이 노력하는 사람 못 따라간다. 그 말이 섬뜩한 찬물이 되어 머리에 퍼부어지는 느낌이다. 나를 가장 찔리게 하는 말들; 노력, 최선, 의지.

최선을 다 해보자고 마음먹은 것이 제발 일순간의 기분이 아니었기를…

Tags: , , , , , , , , ,